바르셀로나라는 도시는?
Barcelona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지방 바르셀로나주의 주도(州都). 인구 150만 3884(2001). 인구로는 수도 마드리드에 이어 에스파냐 제 2 위이나, 항만의 규모와 상공업활동으로 보면 제 1 위인 산업도시이다. 대주교좌가 있는 도시이며, 1450년 창립된 바르셀로나대학도 있어서 카탈루냐의 종교·문화 중심지이기도 하다. 시가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펼쳐지며 티비다보산(532m)을 최고점으로 하는 구릉으로 배후의 3방향이 둘러싸여 있다. 구시가지는 항구를 중심으로 반원모양으로 전개되며, 에스파냐 고딕양식의 대성당(13세기)을 중심으로 한 구역은 고딕가(街)라고 불린다. 그 서쪽을 남북으로 중심가인 람블라스(몇 개의 대로가 이어져 있다)가 뻗어 있어 은행·상사(商社)·고급전문점 등이 늘어서 있다. 거리의 남쪽 끝 항구에 가까운 푸에르타 데라 파스광장에는 이곳에서 죽은 C. 콜럼버스의 동상이 있다. 구시가의 바깥쪽을 반원모양으로 둘러싼 론다스라 하는 대로는 아라곤왕국 시대에 축조된 성벽을 1860년에 헐은 흔적이다. 이곳으로부터 바깥쪽은 신시가지로서, 바둑판모양으로 정연하게 계획된 넓은 도로가 깔려 있어, 굴곡이 심한 좁은 도로의 구시가와는 대조적인 경관을 보여준다. 신시가는 20세기에 들어와 남서쪽의 리오브레가트강, 북동쪽의 베소스강을 건너 동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철도나 주요 도로도 이 두 강을 따라 뻗어있다. 근대적 설비를 갖춘 항구를 중심으로 한 해안부는 중공업지대로서 금속·자동차·항공기·전기기기·화학 등의 공업을 주로 한다. 목면·양모·인조 등의 섬유공업과 제지공업은 리오브레가트강 연안의 골짜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공업발전에 따른 급속한 인구집중으로 1953년에 지역계획이 수립되고 바르셀로나대도시권이 설정되었다. 74년에는 27개 시·읍·촌을 포함하는 대도시권자치체가 설립되어 새로운 지역편성이 이루어짐으로써 포화상태에 있는 공업지대의 재개발, 공업의 지방분산을 꾀하고 있다. 경제적·문화적 번영을 배경으로 하여 고유한 관습법과 공공제도 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13세기에는 왕권으로부터의 자치를 확립하여 시민자치의 전통, 고유한 언어(카탈루냐어)와 문화를 가짐으로써 에스파냐 선진지역의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역사〕 BC 3세기에 카르타고가 식민시를 건설 한 데서 시작되었다. 카르타고의 명가 바르카가
(家)의 이름을 따서 식민시는 바르시노라 하 였다. 고대 로마·서고트족·이슬람교도의 지배 를 받은 뒤 803년 프랑크왕국이 이슬람으로부 터 이 지역을 빼앗았다. 9세기 말에 프랑크에 서 독립하여 바르셀로나백작령이 되었고, 12세기 중반에 아라곤왕국과 합병된 뒤 상공업이 발전하였으며, 1283년 도시특권을 얻었다. 아라곤왕국의 대외진출에 따라 지중해뿐만 아니라 대서양 쪽의 유럽 각지에 상무관(商務館)을 설치하여 무역권(貿易縫)을 비약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15세기에 이르러 페스트의 만연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경제는 쇠퇴하였다. 1463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왕권에 반대하는 도시반란이, 또한 1640년에는 재정부담강화를 꾀한 왕권에 대해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독립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1701년에 시작된 에스파냐 계승전쟁 때에는 합스부르크가(家)의 카를대공(大公)을 지지했으므로 부르봉가
(家)의 펠리페 5세의 승리 후 도시특권을 박탈당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신대륙과의 무역이 자유화되자 다시 상공업이 활기를 띠었고, 독립전쟁과 카를리스타전쟁 등으로 한때 정체되기도 했으나 에스파냐 제1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노동자운동이 활발해져 1855년 섬유노동자를 중심으로 에스파냐에서는 최초로 총파업이 일어났다. 사회주의가 강한 마드리드와는 대조적으로, 이후로는 아나키즘·아나르코 생디칼리슴(노동무정부주의)의 거점이 되었다. 19세기 말에 일어난 카탈루냐자치운동도 겹침으로써 20세기에는 좌익운동·사회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1909년의 징병반대 총파업과 교회에 대한 대규모의 방화, 31년의 마드리드보다 앞선 공화정 선언, 34년의 중앙정부에 대한 카탈루냐자치정부의 반란 등 정치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6년의 에스파냐내전 때에는 반란군의 진압에 성공함으로써 37년에는 중앙정부가 이곳으로 옮겨와 내전 말기까지 공화국측의 지배지역이었으나, 39년 프랑코측에 점령됨으로써 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제25회 올림픽대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