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제위기간, 기원전 753~716년)다.
“내(리비우스)가 판단하기엔, 신들의 가호로 세계의 지배자가 될 로마의 처음은, 저 위대한 로마의 시작은 이럴 수밖에 없었나 보다. 강제로 임신을 하게 된 베스타의 여사제가 쌍둥이를 출산했을 때, (중략)그녀는 누구의 혈통인지가 분명치 않은 아이들의 아버지를 (군신·軍神)마르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중략)소문에 따르면, 아이들을 담은 함지박이 버려진 곳에서 떠다니다가 수면이 얕아지고 물이 마르게 되자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는데, 인근 주변의 산에서 목이 마른 암늑대가 아이들의 우는 소리를 듣고 다가왔고, 부드럽게 아이들의 입에 젖을 물리었으며, 혀로 아이들을 핥고 있었는데, 이를 왕의 목자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중략)일설에 의하면, 라렌티아는 몸을 파는 창녀로 목동들 사이에서는 암늑대라고 불렸다고 한다. (중략)어느덧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되자, 그들은 외양간과 소 주변에서 빈둥대지 않고 사냥을 하기 위해 산과 계곡을 휩쓸고 다녔다. 이를 통해서 몸과 마음이 단련되었고 이미 산짐승들을 때려 눕히는 것은 물론 약탈물을 싣고 가는 강도 떼를 공격해서 물품을 빼앗아 목동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는 중에 날로 그 수가 늘어가는 젊은이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4장)
인용에서 읽을 수 있듯이,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가 실제로 창녀의 아들인지 아니면 베스타 여사제의 아들인지, 이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이 내려진 것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로물루스가 이끈 세력의 정체이다. 그가 이끌었던 젊은이들은 산과 들에서 가축을 치는 목동들이었고, 사냥과 약탈을 일삼았던 일종의 ‘조폭-깡패’ 집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로마’라는 국가를 세우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러 저러한 과정을 치러내면서 로물루스는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설했는데, 이에 대한 리비우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이상이 로물루스가 통치하는 동안에 내치와 전쟁을 통해 이루어낸 업적들이다. 이것들 중 어느 것도 그의 아버지가 (마르스)신이었고, 그 자신도 사후에 신이 되었다는 믿음을 깎아 내리는 것은 없다. (중략) (로물루스)이후 40년 동안 로마가 확고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로물루스에게서 비롯되었다. 진실로 그가 보여주었던 힘과 노력에 그 기원이 있다.”(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15장)
인용에서 말하는 ‘로마가 확고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던 로물루스가 견지한 정책은 강병(强兵)책에 입각한 강국론이었다. 로마의 평화는 실력(實力)이 있을 때만이 보장됨을 로물루스는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이를 실현하였다. 로물루스의 강병-강국론은 초창기에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강병론에 입각한 전 인민의 군대-조직화와 군사-문화화는 로마 인민들의 내적 평화를 보장해 주지는 못하였다. 우선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말미암아, 로마 인민들의 심성이 포악하고 사나워져 있어서 한 곳에서 얼굴을 맞대며 더불어 함께 살기에는 너무도 거칠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 인민들은 갑자기 찾아온 평화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누릴 만큼 성숙해 있지도 않았다. 아니 평화를 경험해 본적조차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한 왕이 누마(제위기간, 기원전 715~671년)이다. 다시 리비우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로마는 아직 물리적 힘과 군사력에 기초해서 건설된 신생 국가였다. 그래서 누마는 법과 법률과 예법(禮法)의 정비를 통해서 나라가 온전히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제도의 마련을 위해 노력한다. 전쟁을 하느라고 사람들의 심성이 사나워져 있었기 때문에, 특히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제도를 친숙하게 여기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간파한 누마는, 사나워져 있는 인민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무기를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중략)폭력과 군대에 매몰되었던 전 인민의 관심은 이와 같은 일(아마도 평화와 관련된 일)들을 숙고하고 이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이전과는)다른 뭔가에 그들의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중략)따라서 국가도 법과 처벌의 두려움이 아닌 신의와 서약(誓約)에 기초해서 다스려져야 한다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19~21장)
평화의 힘이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런데 누마가 펼쳤던 평화-정책의 효과는 단지 시민들의 교화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곧장 외교(外交)에도 큰 효과를 나타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리비우스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러자 사람들은 스스로 누마왕을 모범으로 삼아, 그를 본받아 자신의 품성을 닦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때까지는 그들의 한 중앙에 자리하면서 주변 국가 모두의 평화를 위협했던 (로마를)도시가 아닌 성채라고 간주하고 있던 주변국가 인민들에게도 존경심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 인민이 하나로 뭉쳐 신들을 섬기는 국가를 폭력으로 대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21장)
인용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많겠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로마를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깡패 집단’으로 보고 있는 주변 국가들의 시선인데, 누마왕이 등장하면서 로마는 단지 ‘힘만 센 나라’가 아니라 ‘존경받는 나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누마의 평화-정책이 가져다 준 결과인 것이다. 그 결과 로마는 주변 국가들과 평화-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와 같은 평화-체제에 입각해서 로마는 좁게는 주변 국가를 동맹국가(amicitia et societate)로 끌어들였고 종국엔 이탈리아 전체를 통일했으며, 넓게는 지중해 세계의 통치자(imperator mundi)로 거듭나게 된다. 이는 로마가 군사력에 입각한 힘만 내세웠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로마가 주변국가로부터 ‘존경받는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로마를 ‘존경받는 나라’로 만든 누마의 평화-정책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어찌되었든 누마는 자신의 평화-정책을 상징하는 신전을 세우는데, 이 신전이 바로 야누스 신전이다. 다시 리비우스의 보고를 들어보자.
“누마는 (중략)아르길레툼 지역의 가장 낮은 곳에 전쟁과 평화의 시기를 구분해주는 표시로 야누스의 신전을 세웠다. 야누스 신전이 열려 있으면 국가가 전쟁 중임을, 닫혀 있으면 로마와 주변의 모든 나라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음을 표시한다. (중략)누마가 주변 국가들과의 동맹과 연맹 관계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화합으로 이끌었을 때, 야누스 신전이 닫혔다.”(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21장)
여기에서 잠깐, 고대-로마에서 지금-한반도로 돌아가자! 한반도의 야누스 신전은 아직도 열려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하고 이후 54년이 지났음에도.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남과 북, 양 국가의 지도자가 만난다고 한다. 부디 이번에는 한반도의 야누스 문이 꼭 닫힐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기를! 그래서 평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가 드러나기를! 그리고 이 땅, 한반도, 남한과 북한, 모두 우선은 ‘존경받는 나라’가 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기를, 평화(Pax)의 여신에게 진심으로 기원한다. 평화의 여신이 이 정도는 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고유 의무이니까. 그런데 이 부탁 이외에 한국을 진정으로 ‘존경받는 나라’로 만들어 줄, 그러니까 야누스 문이 닫히고 난 이후의 한국 사회의 제도일반을 평화체제로 재정비하고 여기에 기초해, 이 곳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모두를 ‘단지 돈만 많은 사람들’ 그래서 ‘힘 센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들의 ‘존경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교육과 문화를 꽃피게 할 ‘한국의 누마’가 나오도록, 평화(Pax)의 여신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리일까?
〈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내(리비우스)가 판단하기엔, 신들의 가호로 세계의 지배자가 될 로마의 처음은, 저 위대한 로마의 시작은 이럴 수밖에 없었나 보다. 강제로 임신을 하게 된 베스타의 여사제가 쌍둥이를 출산했을 때, (중략)그녀는 누구의 혈통인지가 분명치 않은 아이들의 아버지를 (군신·軍神)마르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중략)소문에 따르면, 아이들을 담은 함지박이 버려진 곳에서 떠다니다가 수면이 얕아지고 물이 마르게 되자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는데, 인근 주변의 산에서 목이 마른 암늑대가 아이들의 우는 소리를 듣고 다가왔고, 부드럽게 아이들의 입에 젖을 물리었으며, 혀로 아이들을 핥고 있었는데, 이를 왕의 목자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중략)일설에 의하면, 라렌티아는 몸을 파는 창녀로 목동들 사이에서는 암늑대라고 불렸다고 한다. (중략)어느덧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되자, 그들은 외양간과 소 주변에서 빈둥대지 않고 사냥을 하기 위해 산과 계곡을 휩쓸고 다녔다. 이를 통해서 몸과 마음이 단련되었고 이미 산짐승들을 때려 눕히는 것은 물론 약탈물을 싣고 가는 강도 떼를 공격해서 물품을 빼앗아 목동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는 중에 날로 그 수가 늘어가는 젊은이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4장)
인용에서 읽을 수 있듯이,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가 실제로 창녀의 아들인지 아니면 베스타 여사제의 아들인지, 이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이 내려진 것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로물루스가 이끈 세력의 정체이다. 그가 이끌었던 젊은이들은 산과 들에서 가축을 치는 목동들이었고, 사냥과 약탈을 일삼았던 일종의 ‘조폭-깡패’ 집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가 ‘로마’라는 국가를 세우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러 저러한 과정을 치러내면서 로물루스는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설했는데, 이에 대한 리비우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이상이 로물루스가 통치하는 동안에 내치와 전쟁을 통해 이루어낸 업적들이다. 이것들 중 어느 것도 그의 아버지가 (마르스)신이었고, 그 자신도 사후에 신이 되었다는 믿음을 깎아 내리는 것은 없다. (중략) (로물루스)이후 40년 동안 로마가 확고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로물루스에게서 비롯되었다. 진실로 그가 보여주었던 힘과 노력에 그 기원이 있다.”(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15장)
인용에서 말하는 ‘로마가 확고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던 로물루스가 견지한 정책은 강병(强兵)책에 입각한 강국론이었다. 로마의 평화는 실력(實力)이 있을 때만이 보장됨을 로물루스는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이를 실현하였다. 로물루스의 강병-강국론은 초창기에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강병론에 입각한 전 인민의 군대-조직화와 군사-문화화는 로마 인민들의 내적 평화를 보장해 주지는 못하였다. 우선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말미암아, 로마 인민들의 심성이 포악하고 사나워져 있어서 한 곳에서 얼굴을 맞대며 더불어 함께 살기에는 너무도 거칠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 인민들은 갑자기 찾아온 평화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누릴 만큼 성숙해 있지도 않았다. 아니 평화를 경험해 본적조차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장한 왕이 누마(제위기간, 기원전 715~671년)이다. 다시 리비우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로마는 아직 물리적 힘과 군사력에 기초해서 건설된 신생 국가였다. 그래서 누마는 법과 법률과 예법(禮法)의 정비를 통해서 나라가 온전히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제도의 마련을 위해 노력한다. 전쟁을 하느라고 사람들의 심성이 사나워져 있었기 때문에, 특히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제도를 친숙하게 여기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간파한 누마는, 사나워져 있는 인민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무기를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중략)폭력과 군대에 매몰되었던 전 인민의 관심은 이와 같은 일(아마도 평화와 관련된 일)들을 숙고하고 이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이전과는)다른 뭔가에 그들의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중략)따라서 국가도 법과 처벌의 두려움이 아닌 신의와 서약(誓約)에 기초해서 다스려져야 한다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19~21장)
평화의 힘이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런데 누마가 펼쳤던 평화-정책의 효과는 단지 시민들의 교화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곧장 외교(外交)에도 큰 효과를 나타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리비우스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러자 사람들은 스스로 누마왕을 모범으로 삼아, 그를 본받아 자신의 품성을 닦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때까지는 그들의 한 중앙에 자리하면서 주변 국가 모두의 평화를 위협했던 (로마를)도시가 아닌 성채라고 간주하고 있던 주변국가 인민들에게도 존경심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 인민이 하나로 뭉쳐 신들을 섬기는 국가를 폭력으로 대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21장)
인용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많겠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로마를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깡패 집단’으로 보고 있는 주변 국가들의 시선인데, 누마왕이 등장하면서 로마는 단지 ‘힘만 센 나라’가 아니라 ‘존경받는 나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누마의 평화-정책이 가져다 준 결과인 것이다. 그 결과 로마는 주변 국가들과 평화-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와 같은 평화-체제에 입각해서 로마는 좁게는 주변 국가를 동맹국가(amicitia et societate)로 끌어들였고 종국엔 이탈리아 전체를 통일했으며, 넓게는 지중해 세계의 통치자(imperator mundi)로 거듭나게 된다. 이는 로마가 군사력에 입각한 힘만 내세웠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로마가 주변국가로부터 ‘존경받는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로마를 ‘존경받는 나라’로 만든 누마의 평화-정책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어찌되었든 누마는 자신의 평화-정책을 상징하는 신전을 세우는데, 이 신전이 바로 야누스 신전이다. 다시 리비우스의 보고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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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평화체제를 수립한 제2대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 |
여기에서 잠깐, 고대-로마에서 지금-한반도로 돌아가자! 한반도의 야누스 신전은 아직도 열려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하고 이후 54년이 지났음에도.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남과 북, 양 국가의 지도자가 만난다고 한다. 부디 이번에는 한반도의 야누스 문이 꼭 닫힐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기를! 그래서 평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가 드러나기를! 그리고 이 땅, 한반도, 남한과 북한, 모두 우선은 ‘존경받는 나라’가 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기를, 평화(Pax)의 여신에게 진심으로 기원한다. 평화의 여신이 이 정도는 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고유 의무이니까. 그런데 이 부탁 이외에 한국을 진정으로 ‘존경받는 나라’로 만들어 줄, 그러니까 야누스 문이 닫히고 난 이후의 한국 사회의 제도일반을 평화체제로 재정비하고 여기에 기초해, 이 곳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모두를 ‘단지 돈만 많은 사람들’ 그래서 ‘힘 센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들의 ‘존경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교육과 문화를 꽃피게 할 ‘한국의 누마’가 나오도록, 평화(Pax)의 여신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리일까?
〈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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